사근행궁의 건립과 정조의 주정(晝停)
행궁은 국왕이 지방에 거둥할 때 임시 머물던 별궁으로, 고려시대에는 흔히 이궁(離宮)이라고 불렸다. 국왕이 항상 머무르며 국사를 주관하는 본 궁궐을 나와 지방에 머물거나, 전란(戰亂)·휴양·능원 참배 등으로 지방에 별도의 궁궐을 마련하여 임시로 거처하는 곳이 행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이르면 국왕의 거둥에 따른 여러 가지 목적에 따라서 많은 행궁이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중 중요한 것은 남한산성 내의 광주부행궁, 북한산성 내의 양주행궁, 강화도의 강화부행궁, 온양의 온양행궁, 전주의 전주행궁, 수원부의 화성행궁 등이 있었다.
정조는 앞서의 내용과 같이 생부 장헌세자의 묘를 현륭원에 이장하면서 수원 신도시를 건설하고, 성곽을 축조했으며, 서울에서 수원에 이르는 요소와 경유지마다 몇 개의 행궁을 세워 현륭원 행차의 편의를 도왔다.
초기 현륭원행의 길목이었던 과천로에는 1790년(정조 14) 과천행궁(果川行宮)과 수원 입구인 사근평1리 지점에는 사근참행궁(肆覲站行宮, 沙斤行宮)을 설치하였다. 그런데 화성성역의 착공 직후인 1794년 4월 새로 시흥로가 개설되면서 종전의 원행 노정(路程)도 바뀌게 되었다. 그리하여 비교적 큰 규모인 114칸의 시흥행궁(始興行宮)을 비롯한 안양행궁(安養行宮)이 건립되고, 1795년에는 안산행궁(安山行宮)이 건립됨으로써 화성행궁에 이르기까지의 필로(蹕路)에는 1790년에서 1795년에 이르기까지 과천행궁·안양행궁·사근참행궁·시흥행궁·안산행궁·화성행궁 등 6개소의 행궁이 설치되기에 이르렀다.
1790년에 건립된 사근행궁에 대하여 다양한 기록이 존재하지 않아 그 규모와 기능에 대한 세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는 없다. 『원행을묘정리의궤』에 의하면 1795년 정조의 현륭원 행차시 경기감영에서 사근행궁일대의 지명을 일부 개명하였다. 아마도 정조의 원행길이자 혜경궁이 처음 내려오는 길이기에 지명의 품격을 높이고자 하는 의도라고 생각된다.
당시 경기감영은 소사현(素沙峴)은 만안현(萬安峴)으로, 사근천(沙斤川)은 사근평(肆覲坪)으로, 일용현(一用峴)은 일용현(日用峴)으로, 사근현(沙斤峴)은 미륵현(彌勒峴)으로 새로이 개명하였다. 따라서 사근의 한자가 바뀌게 됨에 따라 사근참행궁(沙斤站行宮)에서 사근참행궁(肆覲站行宮)으로 변화되었음을 우선 확인 할 수 있다.
사근참이라는 용어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지역은 주요한 교통의 요지로 파악된다. 실제 1760년(영조 36) 사도세자가 과천·수원을 지나 온양으로 행차할 때 사근 일대를 지났으며, 정조는 이에 1789년(정조 13) 현륭원 천원 시 사근일대의 백성들에게 사도세자의 방문을 기리기 위해 가자를 해주기까지 하였다. 따라서 이 지역은 사근행궁이 들어서기 전부터 도성에서 삼남으로 내려가는 길목의 교통요지였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자연스럽게 정조의 원행을 위한 행궁의 위치로서 선택되었으며 행궁과 참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였다고 할 수 있다.
『원행정례』의 ‘도로교량(道路橋梁)’조에 보면 창덕궁 돈화문에서 원소(園所) 재실까지 여러 노정(路程)의 이름을 들고 앞 노정에서 다음 노정 사이의 거리를 일일이 옛 거리 길이인 ‘리(里)’ 단위로 밝혀놓았다. 이 책에서는 사근참행궁의 위치에 대하여 “사근평은 원동천으로부터 2리이며, 사근참행궁은 사근평으로부터 1리에 있다(肆覲坪 自院洞川二里 肆覲站行宮 自肆覲坪一里)”고 기술하고 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현재 성라자로마을 입구 안쪽 마을인 원골 앞 내(성라자로마을 쪽에서 유한양행 방향으로 흐르던 내)에서 남쪽 방향으로 2리가 되는 사근내벌을 거쳐 다시 1리를 더한 곳에 행궁이 마련되어 있는데, 이곳은 현 고천동사무소 자리라고 할 수 있다.
사근행궁의 규모에 대한 기록은 『원행을묘정리의궤』를 통해서 추론해 볼 수 있다. 『원행을묘정리의궤』, 찬품조에
“사근참, 초10일 출궁 때에 낮에 머무시고, 15일 궁으로 돌아가실 때에 낮에 머무시는데 수라간을 행궁에 설치한다. 행궁 북변의 곳집〔庫舍〕 처마를 보수하여 가건물 5간의 궁인 및 본소 당상 이하에게 음식을 제공한다. 가건물 5간의 기영에서는 행궁을 도배하고 앉을 자리를 마련하여 깐다. 호조에서는 거행하고, 낭청이 초 하루날 임금께 작별을 아뢰고 초 3일날 참을 떠난다(肆覲站 初十日出宮時晝停 十五日還宮時晝停 水刺間設於行宮北邊 庫舍補蹩假家五間 宮人及本所堂上 以下供饋假家五間 畿營擧行 行宮塗褙鋪陳 戶曹擧行 郎廳初一日下直三日出站).”
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 내용으로 보아 첫째, 본체인 행궁은 부속 건물인 수라간이 행궁 북쪽에 설치된 점으로 보아 수라간 남쪽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다섯칸짜리 가건물 두 동이 있었는데 하나는 수라간이요, 다른 하나는 수행원들의 음식을 준비하여 대접하는 자리로 이용된 공궤소로 사용된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남한지(南漢志)』 권2, 궁실(宮室)조에 사근행궁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사근평행궁은 연로(원행로)의 동쪽의 평지에 있다. 정종(후의:정조) 경술년(1790) 건립되었으며 화성행차시에 주필소이다. 정당(正堂)과 별당(別堂)이 있으며 좌우에 창고가 있다. 감관(監官) 1인과 창고지기 1명이 있다(肆覲坪行宮在坪之輦路東 正宗庚戌建卽華城幸行時駐魈所也 有正堂別堂 左右庫舍 監官一人 庫直一名).
이 자료에 의하면 사근행궁은 본채인 정당(正堂)과 별채인 별궁이 또 있었으며, 본채 좌우에 각각 하나의 창고가 있었던 점으로 보아 『원행을묘정리의궤』에 보이는 ‘가가오간(假家五間)’ 두 동은 길게 배치한 모형의 배치란 점이 거의 확실하나 별궁의 위치는 확인할 수 없다.
이와 같이 1790년(정조 14)에 건립된 사근행궁은 정조의 원행시 수시로 주정소(晝停所)로 사용되었다. 현륭원 천봉 이후 정조의 원행중에 사근행궁에 들러 주정한 것은 1794년 5차 원행인 1월 13일 출궁길과 환궁길인 1월 15일 두 번 주정하였으며, 다음해인 6차 원행 때도 모친인 혜경궁 홍씨와 함께 윤 2월 10일과 윤 2월 15일 역시 두 차례 주정하였다. 마지막으로 11차 원행시인 1799년 8월 20일 현륭원 행차시에 주정하였다.
특히 1795년 윤 2월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위한 화성행차는 정조의 각별한 관심속에 진행된 정조시대 최대의 행사이었기에 사근행궁 또한 이전의 원행과는 다르게 준비되었다.
윤 2월 9일 창덕궁을 출발하여 시흥행궁에서 경숙한 정조는 다음날인 윤 2월10일 화성으로 출발하였다. 전날 시흥행궁에서 비가 올 것을 예견하고 일찍 출발하여, 안양참과 원동천을 지나 사근참행궁에 도착하여 혜경궁에게 점심식사를 올렸다..
정조의 예견대로 세찬 비가 내렸고 혜경궁의 가마를 비롯하여 화성으로의 행차가 순탄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정조는 계획에 없었지만 사근참행궁에서 혜경궁을 모시고 경숙하고자 하였으나, 아쉽게도 혜경궁의 주정을 위해 새로 건축한 행궁 건물이 얕고 드러난 곳이 많아 숙박하지 않고 그대로 화성으로 행차하였다.
당시 사근행궁에는 행궁 건물 이외에 혜경궁과 정조가 주정하기 위한 천막을 설치하였으며, 혜경궁의 행동이 앞선 후에 정조가 뒤를 이어 천막에 들어갈 정도로 국왕 정조의 효심은 대단하였다.
당시 천막은 정조가 주정하는 모든 행궁에 설치하였는데, 원행을 주관한 정리소의 의견으로 각 군영에서 한 건씩 담당하였다. 이에 따라 노량행궁은 금위영(禁衛營)에서 거행하고, 시흥행궁은 훈련도감(訓鍊都監), 그리고 사근행궁은 어영청(御營廳)에서 거행하였다. 어영청은 남한산성을 수호하는 도성외곽방어군영으로 광주유수가 겸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광주유수부 관할이었던 사근행궁의 천막을 어영청에서 담당하였던 것이다.
당시 어영청은 사근평행궁에 포장(布帳)을 설치하도록 하기 위하여 군병 17명과 장교 1명을 파견하였으며, 여기에 소용되는 포장은 화성부에 비치되어 있는 70부(浮)를 가져다가 설치하였다. 원행기간에 사근참에서 사용된 비용은 551냥 4전 9푼이다.
사근평의 주정소에 머물 때는 행령의 군사들이 각자 자기의 맡은 자리로 가고, 가마 뒤의 금군과 가마 앞의 별초군 등은 동구에서 좌우로 나누어 종렬로 머물고, 선구금군과 난후금군 등은 길에서 머물렀다. 아울러 앞에서 호위하는 훈련도감의 군병과 후미의 장용영 군병 및 금군은 각기 길 바닥의 맡은 자리에서 머물고, 장용의 대장은 마보군을 통솔하여 행궁 주의를 둘러 작문하고 호위하되 가마가 행궁 근처에 도착하면 잠시 신전을 받들 것을 기다리다가 먼저 작문의 맡은 위치로 달려갔다.
정조는 자신이 주정할 사근행궁에 관리들이 주정을 핑계로 백성들에 대한 탐학을 우려하여 윤 2월 8일에 사관(史官) 1명을 보내어 암행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정조는 8일간의 화성행차를 무사히 끝낸 윤 2월 16일에 사근평 주정소의 지방관인 광주부윤 서미수(徐美修)에게 반숙마(半熟馬) 1필(匹)을 하사하고, 사근참 낭청 부사과 이노수(李潞秀)에게 품계를 올려주었다. 이는 당시 사근행궁의 근무자들이 최선의 노력을 다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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